고덕(高德)의 아침을 걸으며 든 생각
요즘 들어 부쩍 날씨가 변화무쌍하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쨍쨍하던 하늘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런 날에는 마음도 왠지 차분해져서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걷고 싶어집니다.
지금 제가 걷고 있는 곳은 서울 강동구 고덕동입니다. 이곳 주민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고덕(高德)'이라는 지명은 글자 그대로 '높을 고'에 '덕 덕' 자를 씁니다. 높은 덕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살거나, 그런 정신을 기리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지요. 참 따뜻하고 품격 있는 이름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이 땅이 품고 있는 이름의 무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뉴스에서 이 고덕동에 자리한 한 유서 깊은 학교의 이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14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배재고등학교의 이야기입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 잔잔한 씁쓸함과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우리가 발 디디고 서 있는 고덕이라는 이름의 '높은 덕'에, 어쩌면 조금은 누를 끼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목동구장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이야기는 지난 6월 말, 목동구장에서 열린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야구 명문인 배재고등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의 경기가 있던 날이었지요. 고교 야구라고 하면 땀방울과 순수한 열정,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는 스포츠맨십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날 경기장에서는 조금 낯설고 씁쓸한 풍경이 펼쳐졌다고 합니다. 배재고 선수 중 일부가 광주제일고 더그아웃을 향해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말을 외쳤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죠. 처음 이 이야기를 들은 분들은 고개를 갸웃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야구 경기장에서 왜 갑자기 특정 커피 전문점 이름이 나왔을까 하고 말이지요.
이 배경에는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스타벅스 5·18 탱크데이' 논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스타벅스의 한 매장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듯한 문구가 담긴 이벤트 판촉물이 노출되어 큰 파문이 일었던 사건입니다. 광주를 상징하는 학교를 향해 그 아픈 기억을 연상시키는 조롱을 던진 셈입니다. 10대 청소년들의 치기 어린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역사의 무게와 타인에 대한 존중이 너무나 가벼워 보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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培材, '인재를 기른다'는 지고한 이념
사실 배재고등학교의 전신인 배재학당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등불 같은 존재였습니다.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웠고, 고종 임금이 직접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培材)'라는 귀한 이름을 내려준 학교이지요.
실제로 이곳이 배출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킨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민족의 독립과 통합을 위해 평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 그리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서 조국 빛을 되찾아준 지청천 장군까지 모두 배재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그뿐인가요. 문학의 숲을 가꾼 소설가 나도향과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시 '진달래꽃'의 김소월 시인도 이 학교 교정을 거닐며 꿈을 키웠습니다.
이렇듯 배재학당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민족의 아픔을 함께하고 올바른 민주주의 정신을 심어주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찬란한 선배들의 발자취 뒤편으로 다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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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에 세워진 동상과 역사라는 거울
목동구장에서의 그 한마디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들이 나오는 건, 지금 배재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어느 한 인물의 동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로 배재학당 출신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입니다.
이 학교는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강하게 받들며 동상을 세우고, 관련 단체의 교재들을 도서관에 비치해 왔다고 합니다. 심지어 전자도서관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거나 혐오하는 시선이 담긴 책들까지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지요. 학교라는 공간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는 곳입니다. 균형 잡힌 시각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배워야 할 교정에서, 과연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우며 자라고 있었던 걸까요.
이승만 전 대통령 역시 배재가 낳은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4·19 혁명을 통해 국민의 힘으로 독재를 끝내야 했던 우리 역사 속의 과오 또한 뚜렷한 인물이지요. 역사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가르치는 대신, 한쪽 면만을 부각하는 교육 환경이 아이들의 인식을 좁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깊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타인의 고통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혹시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 것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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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高德)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다시 동네 길을 걸으며 고덕이라는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높은 덕을 지닌 땅. 이 아름다운 지명 위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학교가, 정작 높은 덕은커녕 이웃의 상처를 헤집는 미숙함을 보였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합니다.
과거 배재학당이 우리 사회에 주었던 선한 영향력과 주시경, 여운형 같은 선배들이 보여준 큰 뜻을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참 많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건물은 멋지게 지어지고 학교의 위상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그 안을 채우는 정신의 품격은 오히려 과거보다 작아진 게 아닌가 싶어서요.
학교는 단순히 좋은 대학을 보내는 곳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배재고등학교가 이제라도 그 찬란했던 본래의 정체성을 되찾기를 바래봅니다. 조롱의 언어가 아닌 공감의 언어를, 편협한 역사가 아닌 깊이 있는 성찰을 가르치는 학교로 말이지요. 그리하여 이 땅의 이름처럼, 정말로 '높은 덕'을 실천하는 인재들이 그 교정에서 가득 피어나기를 잔잔한 마음으로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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